타워 브리지는 영국 런던 시내를 흐르는 템즈 강 위에 도개교와 현수교를 결합한 구조로 지은 다리다. 런던 탑 근처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1886년에 착공을 시작하여 1894년에 완성한 이 다리는 오늘날에는 런던의 대표적인 상징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타워 브리지(Tower Bridge)는 영국런던 시내를 흐르는 템즈 강 위에 도개교와 현수교를 결합한 구조로 지은 다리다. 런던 탑 근처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1886년에 착공을 시작하여 1894년에 완성한 이 다리는 오늘날에는 런던의 대표적인 상징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완공된 첫 달에만 655번이나 다리가 들어올려졌다. 현재는 1년에 약 500번 정도 다리가 들어올려진다. 처음에는 수력을 이용해 개폐했지만 오늘날에는 전력을 이용하고 있다.
영국이 먼저인 이유는 모르지만
타워 브릿지 뿐만아니라 빅벤, 웨스트민스터 사원, 국회의사당 등 영국의 주요 관광지들이 있습니다.
빅 벤은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궁전 북쪽 흔히 종뿐만 아니라 시계탑 자체도 빅 벤이라고 부른다. 시계탑의 4면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자명종 시계가 달려 있고, 시계 자체도 독립 세워진 것들 가운데 세 번째로 높은 것이다.
빅 벤(Big Ben)은 영국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궁전 북쪽 흔히 종뿐만 아니라 시계탑 자체도 빅 벤이라고 부른다.[1] 시계탑의 4면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자명종시계가 달려 있고, 시계 자체도 독립 세워진 것들 가운데 세 번째로 높은 것이다. 2009년 5월 31일 건립 150주년을 축하하는 행사가 시계탑에서 있었다.[2][3] 1859년에 세워진 빅 벤은 수많은 작품에서 런던을 상징하는 장소로 등장한 바 있으며, 매년 약 12,000명의 관광객이 찾는 대표적인 명소이기도 하다.[4]
본래 웨스트민스터 궁전 건축 당시 시계탑에 붙여졌던 이름 성 스티븐 타워(St. Stephen Tower),[5] 종에 붙여졌던 이름은 그레이트 벨(Great Bell of Westminster)이었지만 모두 공식 제정된 명칭은 아니었으며 건설 책임자였던 벤저민 홀 경의 거구에서 유래한 '빅 벤'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통용되면서[6] 이 이름은 잊혀졌고 2012년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여 빅 벤은 '엘리자베스 타워'라는 공식 명칭을 갖게 되었다.[7]
2017년 9월부터 2021년까지 약 4년에 걸친 기간 동안에는 시계탑의 보수 공사로 인해 종을 울리지 않을 예정이다.[4]
정식으로는 웨스트민스터 세인트 피터 성당 참사회, 간략하게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런던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영국고딕 양식의 거대한 성공회 성당이다. 서쪽으로는 웨스트민스터 궁전과 인접해 있다. 전통적으로 이곳은 영국 왕의 대관식 등 왕실 행사를 거행하거나 매장터로 이용하는 곳이다.
정식으로는 웨스트민스터 세인트 피터 성당 참사회(Collegiate Church of St. Peter in Westminster), 간략하게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은 런던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영국고딕 양식의 거대한 성공회성당이다. 서쪽으로는 웨스트민스터 궁전(영국 국회의사당)과 인접해 있다. 전통적으로 이곳은 영국 왕의 대관식 등 왕실 행사를 거행하거나 매장터로 이용하는 곳이다. 부근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Westminster Cathedral)은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으로 이곳 사원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에펠 탑은 1889년 파리 마르스 광장에 지어진 탑이다. 프랑스의 대표 건축물인 이 탑은 격자 구조로 이루어져 파리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매년 수백만 명이 방문할 만큼 세계적인 유료 관람지이다.
에펠 탑(프랑스어: Tour Eiffel, [tuʁ ɛfɛl])은 1889년파리마르스 광장에 지어진 탑이다. 프랑스의 대표 건축물인 이 탑은 격자 구조로 이루어져 파리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매년 수백만 명이 방문할 만큼 세계적인 유료 관람지이다. 이를 디자인한 프랑스 공학자 및 건축가 귀스타브 에펠의 이름에서 명칭을 얻었으며, 1889년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 세계 박람회의 출입 관문으로 건축되었다.
에펠 탑은 그 높이가 324 m(1,063 ft)이며, 이는 81층 높이의 건물과 맞먹는 높이이다. 1930년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방송용 안테나를 제외하고도, 2004년 지어진 미요 교에 이어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높은 구조물이다.
관광객을 위해 3개 층이 개방되어 있다. 첫 번째 층과 두 번째 층 까지는 표를 구입해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통해 올라갈 수 있다. 첫 번째 층까지의 높이와 첫 번째 층부터 두 번째 층까지의 높이는 각각 300 계단이 넘는다. 가장 높은 세 번째 층은 엘리베이터로만 올라갈 수 있다. 첫 번째 층과 두 번째 층에는 음식점이 운영중이다.
에펠 탑은 여러 영화에서 배경 화면으로 자주 보여지면서 프랑스와 파리 모두를 나타내는 가장 눈에 띄는 상징물이 되었다.
에투알 개선문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기공되어 그의 사후 준공된 매우 거대한 개선문이다. 프랑스 역사의 영광의 상징으로 높이는 50m이다. 개선문의 바로 아래에는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는데 사계절 등불이 꺼지는 일이 없고 헌화가 시드는 일이 없다.
에투알 개선문(프랑스어: Arc de triomphe de l'Étoile)은 1806년나폴레옹에 의해 기공되어 그의 사후 준공된 매우 거대한 개선문이다. 프랑스 역사의 영광의 상징으로 높이는 50m이다. 개선문의 바로 아래에는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는데 사계절 등불이 꺼지는 일이 없고 헌화가 시드는 일이 없다. 샹젤리제 거리의 서쪽, 샤를 드골 광장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프랑스 파리에서 유명한 궁전인 베르사유 궁전이죠?
한번 들어가려고해도 줄을 엄청 서야하고, 돌아보는 시간도 반나절은 족히 걸리는 곳인데 축소해둬서 작네요 ㅎㅎ
베르사유궁전 은 프랑스의 베르사유에 있는 왕궁이다. 베르사유는 원래 파리의 시골 마을 중 하나였으나 이 궁전이 세워진 이후부터는 자치권을 가지는 파리 외곽의 도시가 되었다
베르사유궁전 (프랑스어: Château de Versailles)은 프랑스의 베르사유에 있는 왕궁이다. 베르사유는 원래 파리의 시골 마을 중 하나였으나 이 궁전이 세워진 이후부터는 자치권을 가지는 파리 외곽의 도시가 되었다. 또한 베르사유 궁전은 원래 왕이 사냥할 때 머무는 여름 별장이었으나 1682년루이 14세가 파리에서 이 궁전으로 거처를 옮겨, 1789년 왕가가 수도로 돌아갈 것을 강제될 때까지 프랑스 앙시앵 레짐 시기, 권력의 중심지였다. 바로크 건축의 대표작품으로, 호화로운 건물과 광대하고 아름다운 정원과 분수 그리고 오페라와 거울의 방으로 유명하다. 거울의 방은 벽과 천장이 거울로 된 길이73m의 방인데 1차 세계대전을 형식적으로 마무리지었던 베르사유 조약이 1919년 6월 28일에 이 방에서 이루어졌다. 베르사유 궁전은 한번에 2만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데 안뜰에는 대트리아농과 소트리아농을 포함하여 작은 궁전들이 있다. 또한 1783년 이 안뜰에서 세계 최초의 열기구가 떠올랐다.
베르사유 궁전이 실제로 궁전으로서 사용된 기간은 매우 짧고, 1715년 루이 14세 사후, 뒤를 이은 루이 15세는 곧바로 파리로 다시 궁전을 옮겼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 위에 있는 대성당이다.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침체된 국민의 사기를 고양시킬 목적으로 모금한 돈으로 만들어졌다. 1876년에 기공되어 1910년에 완성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항복 후에 헌당식을 했다.
사크레쾨르 대성당(프랑스어: Basilique du Sacré-Cœur)은 프랑스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 위에 있는 대성당이다.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침체된 국민의 사기를 고양시킬 목적으로 모금한 돈으로 만들어졌다. 1876년에 기공되어 1910년에 완성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항복 후에 헌당식을 했다. 성당 앞에 잔 다르크의 동상이 있고 비잔틴 양식으로 하얀 돔이 우아한 자태로 솟아 있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샤르트르 대성당은 프랑스 샤르트르에 있는 고딕 양식의 가톨릭 성당으로 1979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145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1194년의 화재로 상당 부분이 소실되어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까지 사이에 재건되었다
샤르트르 대성당(프랑스어: Cathédrale Notre-Dame de Chartres)은 프랑스샤르트르에 있는 고딕 양식의 가톨릭성당으로 1979년유네스코지정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145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1194년의 화재로 상당 부분이 소실되어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까지 사이에 재건되었다. 이 재건에는 프랑스 전역에서 수만 명의 자원자가 몰려들었다.[1] 샤르트르 대성당은 성모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낳을 당시 입고 있었다는 옷이 보관되어 있으며 내부의 성모상이 200개 가까이 존재한다[2]
샤르트르 대성당은 고딕 성당의 대명사이다. 이 건물을 지을 때 새로 개발한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신랑에 여러 개의 커다란 창문을 만들 수 있었다. 총 2000m2가 넘는 스테인드 글라스 창을 통해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와 동시에 스테인드 글라스가 선명하게 빛나면서, 석재의 흰 빛과 대조를 이룬다.
대성당은 안길이가 130.2m, 중앙 신랑의 너비가 16.4m, 높이가 36.5m에 이른다. 멀리서 바라보면 이 성당은 ‘옛 탑’(높이 106m), ‘새 탑’(높이 115m)이라고 불리는 2기의 탑이 있다. 중세 때 샤르트르 대성당은 채색되어 있었고, 많은 부분이 금빛으로 빛난다.
퐁텐블로궁은 프랑스의 왕궁이다. 현재 이 성은 많은 프랑스 군주들의 작품으로, 프랑수아 1세의 구조물에서 증축되어 왔다. 건물은 일련의 궁정들로 줄이어 연속되어 있다. 퐁텐블로 시는 과거 궁정 수렵지였던 퐁텐블로 숲의 나머지 주변에서 성장해왔다
퐁텐블로궁(프랑스어: Château de Fontainebleau)은 프랑스의 왕궁이다. 현재 이 성은 많은 프랑스 군주들의 작품으로, 프랑수아 1세의 구조물에서 증축되어 왔다. 건물은 일련의 궁정들로 줄이어 연속되어 있다. 퐁텐블로 시는 과거 궁정 수렵지였던 퐁텐블로 숲의 나머지 주변에서 성장해왔다.
성(Château)는 프랑스에서 실내 장식과 정원에서의 이탈리아매너리즘 양식이 소개되었으며, 이들 장식이 프랑스식 해석에 따라 변형되었다. 16세기 실내 장식에서 프랑스 매너리즘 양식은 "퐁텐블로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조각과 금속 공예, 회화, 치장 벽토(stucco)와 목공예가 합쳐졌으며, 외부는 무늬 모양의 정원 파르테르가 소개되었다. 퐁텐블로 양식은 주조된 조형물과 우화적인 회화를 결합하여, 그 가장자리는 마치 가죽이나 종이처럼 칼집을 내고, 소용돌이처럼 돌돌 말며, 아라베스크 무늬와 그로테스크 양식을 결합한다. 퐁텐블로의 이상적인 여성미는 매너리스트(기교가)이다. 긴 목에 작은 오밀조밀한 머리와 과장된 긴 토로소와 팔다리, 작고 높은 가슴으로 거의 후기 고딕 시대의 미의식으로 회고한다. 퐁텐블로의 새 작품들은 정제되고 세밀한 조판술로 기록되어 감정가와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포되었다. 퐁텐블로파에 의한 조판술을 통하여, 이 새로운 양식은 다른 북유럽 중심부에 전해지며, 특히 안트와프와 독일, 최종적으로 런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왕가는 1697년 부지를 사들이고 사보이의 왕자 오이겐(Eugen von Savoyen)이 거대한 공원을 우선 조성하였다. 벨베데레 궁전은 도시 근교에서 왕족이 보낼 수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1714년 건축이 시작되어 일단 틀을 닦고 정원도 만들게 되었다. 그 주변으로는 오랑제리와 그림을 전시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건축은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가 맡았으며 그는 지금까지도 오스트리아의 바로크 양식을 극대화한 거장으로 손꼽힌다. 그와 함께 베네치아 출신의 조각가 죠반니 스타네티가 함께 하였다. 하부 벨베데레 궁전의 건설은 1716년 완공되었으며 천정은 마르니코 알트몬테라는 화가가 완성하였다.
서쪽에는 정교한 그로테스크 양식을 가미한 공간이 나타나며 침소로 쓰인 곳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회화 전시실도 있는데 그곳의 장칙은 도메니코 파로디(Domenico Parodi)가 맡았다. 내부의 또다른 화강암으로 된 방은 1720년부터 지아코모 델 포라는 사람이 천정 색채 작업을 하였다. 동쪽으로는 전체 응접실과 식사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1720-1723년에 걸쳐 상부 벨베데레가 완공되었는데 원래는 중앙 정원으로 하여금 궁전의 축을 잡고자 하려는 의도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궁전은 1752년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에게 팔렸고 그녀가 최초로 이곳을 벨베데레라 명하였다. 합스부르크 가 하에 궁전은 더욱 더 명성을 다지게 되었다. 1775년 이후 벨베데레 궁전은 황실 회화 전시장으로 쓰였으며 하부 벨베데레 궁전으로 다른 궁전의 그림을 이전해오기도 하였다. 가장 마지막에 머물었던 사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갤러리 박물관이 벨베데레 궁전으로 정해졌다. 2차 대전 중 많은 피해를 입어 복구에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현재 외부 개보수 작업에 착수하고 있으며 주로 정원을 다시 꾸미는 일에 치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08년에 완공을 했다.
피사의 사탑은 이탈리아 서부 토스카나주의 피사에 있는 피사 대성당의 종루이며 관광 명소이다. 기울어진 탑으로 유명하다. 1173년 8월 9일 착공 시에는 수직이었으나, 13세기에 들어 탑의 기울어짐이 발견되었다.
피사의 사탑( - 斜塔, 이탈리아어: Torre di Pisa)은 이탈리아 서부 토스카나주의 피사에 있는 피사 대성당의 종루(鐘樓)이며 관광 명소이다. 기울어진 탑으로 유명하다.
1173년8월 9일 착공 시에는 수직이었으나, 13세기에 들어 탑의 기울어짐이 발견되었다. 높이는 지상으로부터 55m, 계단은 297개로 이루어졌으며, 무게는 14,453t이다. 지반에 가해지는 평균 응력은 50.7tf/m2란 계산 결과가 나왔다. 현재의 기울기의 각도는 약 5.5도이고 기울기의 진행은 여러 차례의 보수공사로 멈추었다. 흔히 중세의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불리고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바티칸 시국 남동쪽에 있는 대성당을 말한다. 바티칸 대성당이라고도 부른다. 성지 가운데 하나이자 기독교 세계의 모든 교회 가운데 가장 거대한 교회로 유일무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라틴어: Basilica Sancti Petri, 이탈리아어: 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은 바티칸 시국 남동쪽에 있는 대성당을 말한다. 바티칸 대성당(Basilica Vaticana)이라고도 부른다. 성지 가운데 하나이자 기독교 세계의 모든 교회 가운데 가장 거대한 교회로 유일무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1][2][3]개신교를 제외한 기독교의 전승(애초에 개신교는 전승을 인정하지 않는다)[4][5][6] 에 따르면, 서기 67년에 순교한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로마의 초대 주교, 즉 교황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 로마의 수많은 교회 가운데 가장 유명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대중의 인식과는 달리 으뜸 교회는 아니다. 로마 교구의 대성당의 명예를 지닌 교회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이다.
성 베드로의 시신이 대성당의 제대 아래에 묻혀 있는 까닭에 옛날부터 교황이 선종하면 그 시신을 제대 아래에 안치해오고 있다. 대성당은 4세기 이래 이 장소에 있었다. 대성당의 건설은 1506년4월 18일에 시작되어 1626년에 완료되었다.[7]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 종교성과 역사성, 예술성 때문에 세계적인 순례 장소로 유명하다. 르네상스부터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계의 거장들이 주임 건축가 직책을 계승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지은 건축 작품으로서 당대의 가장 거대한 건물로 여겨진다.[8] 로마의 모든 초창기 성당들처럼[9] 성 베드로 대성당 역시 입구가 동쪽에 있으며 후진(後陣)은 서쪽 끝에 있다.
)은 고대 로마 시대의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로마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원형 경기장이다. 현재는 로마를 대표하는 유명한 관광지로 탈바꿈하였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동상(巨像:colossus)에서 유래한다. 원래 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으로, 서기 70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해 10년 뒤에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완공했다.[1]
이곳은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입니다.
두오모 성당 하면 밀라노에만 있는 것이아니라 피렌체에도 있어서 그곳은 피렌체 두오모 성당이라 부릅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짓고 있는 로마 가톨릭 성당이다. '사그라다'는 스페인어로 신성한 또는 성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졌으며, 파밀리아는 가족을 뜻하기 때문에 성가족성당이라고도 불린다. 카탈루냐 출신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하고 직접 건축을 책임졌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카탈루냐어: 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ília, 스페인어: Templo Expiatorio de la Sagrada Familia)은 스페인바르셀로나에 짓고 있는 로마 가톨릭성당이다. '사그라다'는 스페인어로 신성한 또는 성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졌으며, 파밀리아는 가족을 뜻하기 때문에 성가족성당이라고도 불린다. 카탈루냐 출신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하고 직접 건축을 책임졌다. 이 건물에 대한 가우디의 작업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의 일부이며, 2010년 11월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성당에서 준 대성당으로 승격을 선포했다.[1][2][3]
1882년 성당 건축은 Francisco de Paula del Villar에 의해 시작되었다.[4] 1883년 비야르가 사임하자 가우디가 수석 건축가로 취임하여 고딕 건축 양식과 아르누보 양식을 결합한 건축 및 엔지니어링 스타일로 프로젝트를 변형시켰다. 가우디는 그의 남은 생애를 프로젝트에 투입했으며, 1926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프로젝트의 1/4이 완료되었다. 이 성당은 가우디가 동부 성만 완성하고 죽은 단 하나의 성당이다.[5]
성당 건축은 개인적인 기부금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천천히 진행되었다가 1950년대에 스페인 남북 전쟁에 의해 중단되었다. 건설이 시작된 이래로 컴퓨터 지원 설계 및 CNC(Computerized Numerical Control)와 같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2010년 중반에 건설이 가속화되며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10개의 첨탑을 추가로 건설하는 등 프로젝트의 가장 큰 과제 중 일부들이 현재 남아 있다. 각각은 신약 성경에서 중요한 성경적 인물을 상징하며, 가우디 사망 100주년인 2026년에 완공될 것으로 예상된다.[5]
또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까탈루냐 모더니즘로 지어진 최고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6]
가우디는 이 성당을 지으면서 건축과 장식의 구성요소, 조형미와 아름다움, 기능과 형태, 외부와 내부 사이의 완벽한 조화를 추구했다. 지하 예배당과 성당의 내부 뒤에 부분은 네오고딕 양식으로 만들었고 그 이후, 성당의 나머지 부분은 자연의 형태를 모방하여 만들었다. 성당의 내부는 나무처럼 기울어지고 나선형의 기둥으로 인해 숲을 닮아서 간단하고 튼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우디는 이런 특이한 형태의 건축기법을 그가 지은 구엘공원이나 구엘 성지에서 검증한 후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지을 때 사용하여 조형미와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갖춘 구조적으로 완벽한 건축물을 만들었다.[7]
신교도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는 베릴린 브라이트샤이트 광장 중앙의 쿠담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교회 구관은 1890년대에 지었는데, 1943년의 폭격으로 크게 파괴되었다.
신교도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독일어: Kaiser-Wilhelm-Gedächtniskirche, 보통은 줄여서 Gedächtniskirche이라고 부른다)는 베릴린 브라이트샤이트 광장(Breitscheidplatz) 중앙의 쿠담거리(Kurfürstendamm)에 위치하고 있다. 교회 구관은 1890년대에 지었는데, 1943년의 폭격으로 크게 파괴되었다. 하나의 현관과 부속예배실에 딸린 분리된 종탑으로 구성된 현재의 교회 건물은 1959년부터 1963년 사이에 지었다. 파손된 첨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구관의 1층에 기념관을 만들었다.